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정상화(Jeong Sang-Hwa).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단색화 작가이자 앵포르멜 이후의 추상미술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표면의 질감과 색의 배치, 그리고 캔버스를 반복적으로 긁고 메우는 작업 방식은 그만의 독자적인 미학을 형성합니다. 이 글에서는 정상화 작품이 지닌 조형적 특징을 중심으로, 질감, 색, 반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 예술 세계를 해석해봅니다.
질감의 조형화 – 반복된 긁기와 메우기
정상화의 작품은 단순히 평면 위에 색을 올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는 캔버스를 긁고, 메우고, 다시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고유의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이 ‘긁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철학적인 수행입니다. 규칙적으로 그어진 선들은 기계적이기보다, 인간적인 흔들림과 시간의 감정이 담긴 흔적으로 읽힙니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과 백색 안료를 반복적으로 올린 후, 일정한 간격으로 긁어냄으로써 캔버스 위에 음각의 그리드를 형성합니다. 이때 발생하는 표면의 요철과 균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조형의 핵심 요소가 됩니다. 질감은 시각적인 감상뿐 아니라, 촉각적 상상을 자극하며 관람자의 감각을 확장시킵니다. 이러한 방식은 마치 수행자의 ‘참선’과도 같은 반복이며, 결과보다 과정 자체에 집중한 예술 철학을 드러냅니다. 이는 앵포르멜 이후, 작가의 몸과 행위가 직접 작품에 개입하는 동시대 미술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정상화에게 있어 질감은 회화의 경계를 넘는 철학적 언어입니다.
색의 절제 – 단색과 모노톤의 깊이
정상화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절제된 색 사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흰색, 회색, 베이지, 갈색 등 중립적이면서도 자연적인 색조는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안정적이고 명상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색’ 속에서도 미묘한 변화와 레이어의 깊이가 살아 있습니다. 그의 회화는 멀리서 보면 하나의 색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십 겹의 색이 얇게 겹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단색화가 지닌 ‘비움’과 ‘여백’의 미학을 시간의 중첩으로 시각화한 방식입니다. 색은 단순히 시각 요소를 넘어, 감정과 정신의 흐름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작용합니다. 특히 흰색은 정상화에게 단순한 바탕색이 아니라 정화(淨化)의 색, 초월과 침묵의 색으로 읽힙니다. 색의 절제는 감정의 절제가 아닌, 더 깊은 감각과 통찰을 가능케 하는 도구이며, 바로 이 점이 단색화의 핵심이자 정상화 작품이 갖는 독창성입니다.
반복의 의미 – 수행, 시간, 존재의 증명
정상화 작품의 또 다른 핵심은 반복성입니다. 앞서 언급한 긁기와 메우기의 반복, 색의 덧칠, 그리고 격자 패턴의 구성은 단순한 양식적 특성을 넘어, 작가 존재의 증명이자 시간의 기록입니다. 하루에 한 칸씩만 완성하는 작업 방식은 속도보다 밀도,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철학을 보여줍니다. 이 반복은 어떤 형식적 완성이나 장식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과 마주하고 세계와 대화하는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관람자에게도 일종의 시간 감각을 제공합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위에 쌓인 수많은 시간, 감정, 집중의 층위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와 빠른 소비에 익숙한 현대사회에서 느림의 미학과 존재의 본질을 일깨우는 메시지로도 작용합니다. 정상화의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다시 쌓이는 다름이며, 한 사람의 일생이 응축된 예술적 연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화의 회화는 단색으로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수없이 반복된 행위, 감정,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질감은 형식을 넘는 감각의 언어이며, 절제된 색은 침묵 속 깊은 감동을, 반복은 존재의 진실함을 드러냅니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게 만듭니다. 지금, 정상화의 작품 앞에 다시 서보세요. 고요하지만 강렬한 예술의 호흡이 들릴 것입니다.
'예술 > 예술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인치 캔버스에 담긴 우주, 소통과 희망을 그리는 강익중 작가 (0) | 2025.04.30 |
---|---|
몸짓으로 그려낸 삶의 흔적, 이건용 작가를 만나다 (0) | 2025.04.29 |
윤형근 화가: 푸른 심연 속 천지(天地)의 문을 열다 (0) | 2025.04.20 |
박서보 화가: '묘법'으로 빚어낸 예술혼과 그 깊이 (0) | 2025.04.19 |
고영훈 화백의 작품 세계와 예술 철학 (0) | 2025.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