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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아일랜드 출신 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를 기억하며

by Dreamer BiBi 2025.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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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아일랜드 출신 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를 기억하며
출처 : 구글 /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아일랜드 출신 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를 기억하며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국적 사업가였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조지 루이스 쇼 (George Lewis Shaw, 1880-1943)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업가에서 독립운동의 든든한 후원자로

1880년 중국에서 태어난 조지 루이스 쇼는 1907년, 중국 단둥(당시 안동현)에 무역 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설립하며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목재업과 증기선 사업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죠.

놀라운 점은, 이렇게 사업으로 성공한 그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국적을 가졌던 그가 왜 타국의 독립운동을 그토록 열렬히 지지했을까요? 일각에서는 아일랜드 역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역사가 그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륭양행, 독립운동의 심장이 되다

조지 루이스 쇼는 자신이 운영하던 이륭양행 2층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 및 교통 사무국으로 흔쾌히 제공했습니다. 이곳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연결고리이자 비밀스러운 회합 장소, 그리고 중요한 정보와 자금이 오가는 핵심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배를 이용하여 김구, 이동녕 선생과 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무기, 독립운동 자금, 비밀 문서 등을 운반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제의 감시를 피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륭양행은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심지어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의 폭탄 운반을 돕기도 했다니, 그의 헌신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는데요, 직접 자금을 지원하거나 자신이 발행하는 수표로 바꿔 독립운동가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신념

이러한 그의 활동은 당연히 일본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결국 1920년,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여권 미소지 혐의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그의 독립운동 지원 활동 때문이었죠. 다행히 영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4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에도 그는 꿋꿋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잊혀진 영웅을 기억하며

조지 루이스 쇼는 1943년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숭고한 헌신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2012년에는 그의 손녀인 마저리 허칭스 여사에게 훈장이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응원하고 헌신했던 조지 루이스 쇼.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국경을 넘어선 인간애와 숭고한 희생정신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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