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의 횃불을 들다

by Dreamer BiBi 2025. 5. 20.
반응형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의 횃불을 들다
출처 : 구글 /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항일의 횃불을 들다

 

대한제국 말기, 격동의 시기에 한국 땅을 밟아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푸른 눈의 외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입니다. 한국 이름으로는 배설(裵說)이라고 불렸던 그의 이야기는 잊혀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입니다.

대한제국에 울려 퍼진 정의로운 외침, 대한매일신보

1904년, 러일전쟁의 포성이 한반도를 덮치던 암울한 시기,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양기탁 선생과 손을 잡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라는 신문을 창간합니다.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는 신문을 넘어,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침략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억압받는 우리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국한문과 영문판으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한국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베델은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서, 일본의 검열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 논설을 거침없이 게재하며 민족의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든든한 지원군

나라를 빚에서 구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대한매일신보는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홍보했습니다. 베델의 신념과 언론의 힘은 꺼져가던 민족의 불씨를 되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푸른 눈에 담긴 뜨거운 조국 사랑

영국인이었던 베델은 영일동맹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의 직접적인 탄압을 비교적 덜 받으며 언론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의 고통에 공감했기에 그토록 용감하게 일제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을 위해 싸울 것이다.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는 베델이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당시 많은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삶의 마무리

하지만 그의 강직함은 결국 일제의 눈엣가시가 되었고, 잦은 재판과 탄압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은 190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낯선 땅에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푸른 눈의 영웅,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을 기억합니다. 그의 용기와 헌신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