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한국 근대화의 씨앗을 심다

by Dreamer BiBi 2025. 6. 19.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한국 근대화의 씨앗을 심다
출처 : 구글 /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한국 근대화의 씨앗을 심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근대 교육과 기독교 선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선교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바로 그의 헌신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펜젤러, 조선에 첫발을 내딛다

1885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인 구한말, 27세의 젊은 미국 감리회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는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당시 조선은 서양 문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격동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며 근대 교육의 씨앗을 뿌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그의 열정으로 배재학당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성장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교육을 넘어 선교와 문화에 기여하다

아펜젤러의 활동은 교육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여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장을 열었습니다. 또한, 성경 번역에 힘쓰고 배재학당 내에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여 성경과 함께 당시의 주요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을 인쇄하는 등 지식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단순히 서양 문물을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협성회'를 조직하여 서구식 의회법을 처음으로 시연했으며, 당시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던 많은 이들을 지지하고 도왔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인 '아편설라'에서도 조선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의 희생, 그리고 아펜젤러길

아펜젤러 선교사의 삶은 1902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막을 내렸습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여 함께 타고 있던 조선인 청년과 여학생을 구하려다 순직했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44세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어 영원히 한국 땅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헌신을 기리고자, 오늘날 그의 발자취가 남은 여러 지역에 '아펜젤러길'이라는 명예 도로가 조성되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아펜젤러길: 감리교신학대학교 캠퍼스 앞에 조성된 이 길은 아펜젤러가 한국 감리교 선교의 기틀을 다진 의미를 되새깁니다.
  • 인천 중구 아펜젤러 선교길: 아펜젤러 선교사가 처음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제물포 지역에 '1885 아펜젤러 선교길'이 있습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에서 내리교회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초기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아펜젤러길은 단순한 도로를 넘어, 아펜젤러 선교사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한국 근대사에 대한 그의 지대한 공헌을 기억하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그의 헌신 덕분에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되새기며, 아펜젤러 선교사의 삶과 정신을 다시 한번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